박영식은 관청 사무를 끝내고서 집에 돌아왔다. 얼굴빛이 조금 가무스름한데 노란빛이 돌며, 멀리 세워 놓고 보면 두 눈이 쑥 들어 간 것처럼 보이도록 눈 가장자리가 가무스름 한데 푸른빛이 섞이었다. 어디로 보든지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삼십 내외의 청년이다. 문에 들어선 주인을 본 아내는 웃었는지 말았는지 눈으로 인사를 하고 모자와 웃옷을 받아서 의걸이에 걸며,
“오늘 어째 이렇게 일찍 나오셨소?”
하며 조금 꼬집어 뜯는 듯한 수작을 농담 비슷이 꺼낸다. 영식은 칼라를 떼면서 체경 앞에 서서,
“이르긴 무엇이 일러, 시간대로 나왔는데”
하고 피곤한 듯이 약간 상을 찌푸렸다.
“누가 퇴사 시간을 몰라서 하는 말요?”
”그럼.”
“오늘은 밤을 새고 들어오지를 않았으니까 말예요.”
영식의 아내는 구가정 부인으로 나이가 한 두 살 위다. 거기다가 애를 여럿 낳고 또 시집살이를 어려서부터 한 탓으로 얼굴이 몹시 여윈데다가 몸에 병이 잦아서 영식에게 대면 아주머니 뻘이나 돼 보인다. 그런데다가 히스테리 기운이 있어 몹시 질투를 하는 성질 이었다.
“내가 언제든지 밤을 새우고 다녔소? 어쩌다 한 번 그런 때가 있지.”
본명은 경손(慶孫), 필명은 빈(彬). 1902년 3월 30일 서울 청파동 1이 56번지에서 출생. 나성연(羅聖淵)과 김성녀(金姓女) 사이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재고보를 졸업 후 경성의전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문학 수업을 위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러나 조부가 학비를 보내지 않자, 되돌아와 1919년 안동에서 1년간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1921년 『배재학보』에 「출향」을 발표하고, 뒤이어 『신민공론』에 단편 「추억」을 발표하면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에는 박종화(朴鍾和)‧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 그리고 현진건(玄鎭健)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제2호에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발표했다. 또한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환희(幻戱)」를 연재하여 소년 문사로 주목을 받았다.
「녯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1922), 「17원 50전」(1923), 「은화」(1923), 「춘성(春星)」(1923) 등 감상적인 작품을 발표하다가, 「여이발사」, 「행랑자식」 등을 발표하면서 사실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한다. 1924년에 「자기를 찾기 전에」,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을 발표하고, 1925년에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 등의 완숙한 작품을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다. 1926년에 수학(修學)의 뜻을 품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 후 폐병을 앓으면서 단편 「피 묻은 몇 장의 편지」, 「지형근」, 「화염에 싸인 원한」 등을 발표했다. 1927년 8월 26일 사망했다. 사후에 장편 「어머니」(1939)가 출간되었다. 그는 가통인 의술을 이으려는 조부의 고집으로 방랑과 낭만의 꿈이 짓밟혀 실연과 병과 가난 속에서 단편 20여 편과 장편 2편, 그리고 「그믐달」(1925) 등 수필 몇 편을 남기고 있다. 그의 소설은 초기에는 백조파 특유의 감상적(感傷的)이고 환상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러나, 「여이발사」 이후에 사실적인 경향으로 변하여 사소한 사건이라도 냉철하게 관찰하여 객관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사실주의 소설의 전형인 「뽕」, 「물레방아」 같은 수작을 남겼으며, 탐미적 경향인 「벙어리 삼룡」으로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