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5월 <<삼천리(三千里)>>에 발표한 강경애(姜敬愛)의 단편소설. 식민지 시대 말기에 군국주의로 경도된 일본의 정책과 이에 대응하던 지식인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두 사람의 지식인이 등장한다. 하나는 주인공 K선생이고, 다른 하나는 최교장이다. 이 두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표면에 내세워 지식인의 삶의 자세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저자 : 강경애
1907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 출생. 5세 때인 191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며, 이 시기에 겪었던 심리적‧경제적 곤란은 그의 작품경향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맹휴학에 가담한 관계로 1923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3년, 문학강연회를 계기로 양주동(梁柱東)과 만나게 되어 이듬해 서울로 함께 올라왔으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修學)했다 양주동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1924년 9월 귀향하여 야학운동‧신간회 등 여러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1931년경 간도를 여행하고 귀국한 후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문단 등단작은 1931년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발표한 「파금(破琴)」이다. 같은 해, 장하일과 결혼하여 다시 간도로 이주한 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안수길(安壽吉)‧박영준(朴榮濬) 등과 함께 동인지 『북향(北鄕)』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지냈고, 이듬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1942년 남편과 함께 귀향했으나 1943년 세상을 떠났다. 강경애는 박화성(朴花城)과 더불어 당대에 “프로문학 진영의 두 수준 있는 문학작가”라는 평을 받은 작가이다. 그는 카프 조직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으면서도 식민지적 갈등과 모순에서 계급 문제를 읽어내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해 낸 특이한 작가로 꼽히며, 특히 간도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점, 계급 문제를 드러내되 관념보다는 체험에 의지했다는 점에서 최서해(崔曙海)의 경향을 이은 작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보고 충격을 받은 한 청년이 만주에 가서 투쟁에 헌신하다가 사형을 당한다는 내용의 등단작 「파금」, 소금밀수를 매개로 해서 간도 이주민의 생활을 묘파한 「소금」(1934)을 비롯하여, 「채전(菜田)」(1933), 「축구전(蹴球戰)」(1933), 「모자(母子)」(1935) 등이 모두 만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그런가 하면 첫 장편 「어머니와 딸」(1931) 등 여성의 삶을 정면으로 문제삼은 작품들도 있다.
「어머니와 딸」은 지주에게 유린당한 후 타락한 예쁜이, 기생으로 대학생에게 기만당한 산호주 등 구세대 여성과 그들의 딸이자 며느리인 옥이를 내세워, 당시 여성들이 받고 있는 억압을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보여주면서 예속적인 삶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려는 각성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층민의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지하촌」(1934)은 1930년대 빈궁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강경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간문제」(1934)는 이러한 여러 가지 경향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준다.
가난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농촌을 탈출, 도시 노동자가 되어 각성의 과정을 밟다가 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선비의 삶을 통해 작가는 계급 문제‧여성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이기영(李箕永)의 「고향」 등에 가리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1980년대 들어 재조명되면서 일제하 리얼리즘의 최고 성과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강경애 작품에 대한 일반적 평가도 “자신의 삶과 사회를 진지하게 관찰한 점은 인정되나 주제의식을 깊이 있게 형상화하는 데는 실패하였다”는 당대의 평가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