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동생 K야. 간번 너의 편지는 반갑게 받아 읽었다. 그리고 약해졌던 너의 몸도 다소 튼튼해짐을 알았다. 기쁘다. 무어니무어니해도 건강밖에 더 있느냐.
K야 졸업기를 앞둔 너는 기쁨보다도 괴롬이 앞서고 희망보다는 낙망을 하게 된다고? 오냐 네 환경이 그러하니만큼 응당 그러하리라. 그러나 너는 그 괴롬과 낙망 가운데서 당연히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쁘고 희망에 불타는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
K야 네가 물은 바 이 언니의 연애관과 내지 결혼관은 간단하게 문장으로 표현할 만한 지식이 아직도 나는 부족하구나. 그러니 나는 요새 내가 지내는 생활 전부와 그 생활로부터 일어나는 나의 감정 전부를 아무 꾸밀 줄 모르는 서투른 문장으로 적어 놀 터이니 현명한 너는 거기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하여 다고.
K야 내가 요새 D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여 원고료 이백여 원을 받은 것은 너도 잘 알지. 그것이 내 일생을 통하여 처음으로 많이 가져 보는 돈이구나. 그러니 내 머리는 갑자기 활기를 얻어 공상을 다하게 되더구나.
저자 : 강경애
1907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 출생. 5세 때인 191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며, 이 시기에 겪었던 심리적‧경제적 곤란은 그의 작품경향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맹휴학에 가담한 관계로 1923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3년, 문학강연회를 계기로 양주동과 만나게 되어 이듬해 서울로 함께 올라왔으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했다 양주동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1924년 9월 귀향하여 야학운동,신간회 등 여러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1931년경 간도를 여행하고 귀국한 후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문단 등단작은 1931년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발표한 파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