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 <최 서방>에는 지주의 가혹한 수탈로 이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농민들의 삶이 나타나고 있다. 1929년 이후 수년간의 침묵 후에 다시 작품 활동을 떠나는 농민들의 삶이 나타나고 있다.
새벽부터 분주히 뚜드리기 시작한 최서방네 벼마당질은 해가 졌건만 인제야 겨우 부추질이 끝났다.
일꾼들은 어둡기 전에 작석을 하여 치우려고 부리나케 섬몽이를 튼다. 그러나 최서방은 아침부터 찾아와 마당질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우들부들 떨며 마당가에 쭉 늘어선 차인꾼들을 볼 때에 섬몽이를 틀 힘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실상 마당질 끝나는 것이 귀치않다느니보다 죽기만치나 겁이 난 것이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호미값(胡米價)이라 약값(藥價)이라 하고 조르는 것을 벼를 뚜드려서 준다고 오늘 내일 하고 미뤄오던 것인데 급기야 벼를 뚜드리고 보니 그들의 빚은 갚기는커녕 송지주의 농채도 다 갚기에 벼 한 알이 남아서지 않을 것 같아서 으레 싸움이 일어나리라 예상한 까닭이다.
본명 하태용. 1904년 9월 8일 평북 선천에서 출생했다. 1919년 삼봉 공립 보통 학교 졸업 후 중정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부의 반대로 낙향했다.1924년 다시 상경하여 휘문고보에서 수학하였으며, 1928년 일본에 건너가 토오요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서 글방이 깨어져가 2등 당선되었으며, 1925년에는 생장 현상 문예시 부처님,검님 봄이 왔네가 당선되기도 했다. 1927년 조선문단에 단편 소설 최 서방이 당선되면서 단편 소설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인두 지주 등 경향성을 띤 작품을 발표하였다.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 최 서방에는 지주의 가혹한 수탈로 이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농민들의 삶이 나타나고 있다. 1929년 이후 수년간의 침묵 후에 다시 작품 활동을 떠나는 농민들의 삶이 나타나고 있다. 1929년 이후 수년간의 침묵 후에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경향을 탈피하였거니와, 1935년 발표한 백치 아다다에서 그 변모 양상이 확연히 드러난다. 백치 아다다에서는 정신적 불구자를 내세워 세태 풍속과 인심을 그려 내면서 황금 만능의 세태에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현실적인 상황은 단지 작품을 쓰게 되는 조건만을 암시할 뿐이며, 실제 작품에서 현실은 구체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 즉 작가는 작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즉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전력을 기울여 상징과 신비 속에서 해결을 모색하는 예술파적인 창작 방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