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부터 1923년 1월까지 <동명>에 3회에 걸쳐 연재된 작품.
감옥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죄수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통해, 일신(一身)의 편안함만을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적(利己的) 인간 본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태형(笞刑)>은 1922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3회에 걸쳐 <동명(東明)>에 연재된 김동인의 단편소설이다. [옥중기의 일절]이라는 부제(副題)처럼 3·1 운동시의 옥중기(獄中記)라 하겠다.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 ―정상적인 인간의 생활 모습은 찾아볼 수도 허용되지도 않는 공간에 놓인 인간들의 언행을 통해, 인간성의 부정적인 한 측면을 명료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더운 여름날 좁은 감방에서 한 사람이라도 없어져서 공간이 조금이나마 넓어지는 것만큼 다행스러운 일은 없다. 그래서 태형(笞刑) 받기 싫어서 공소(公訴)를 한 노인을 매도(罵倒)하여 태형장으로 내몰고, '나'는 노인의 태형 맞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노인이 받게 되는 태형과 감옥의 극한적 상황이 긴장감을 이루는 가운데,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 보여 줄 수 있는 추한 이기심(利己心), 도덕이나 양심을 포기해 버리고 오로지 충동적인 욕구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부정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감옥'이라는 실제적이요, 다분히 상징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 평소의 겸양·덕성·예절로부터 벗어나 그 심성이 얼마나 왜소해지고 추해질 수 있는가 하는 인간의 비극적 진실을 진단해 본 작품이라 하겠다.
1900년에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에 처음에는 화가가 될 작정으로 천단(川端)미술학원에 재학중이다가 중도에 뜻을 달리하여 문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무정}이 있었을 뿐으로 순문학 작품은 아직 형태조차 없던 시대건만, 어려서부터 외국문학을 섭렵하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에 독립만세의 봉화가 터지기보다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순문학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신문학운동의 봉화인 그 잡지는 순전히 선생의 사재로서 발간되었던 것이다.
{창조} 발간 이후 김동인 선생은 30여 년간 오로지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셨다. 문학자가 문학도에 정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되, 문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딱한 사정에서 거개의 우리나라 문인들이 문학 이외에 반드시 생계를 위한 별도의 직업을 가졌건만, 선생만은 조석이 마루한 극도의 빈한(貧寒) 속에서도 오직 문학만을 일삼으셨던 것이다. 오직 한 번 조선일보사 문예부장에 일시 취임했던 일이 있으나, 선생은 그 길이 아님을 이내 깨닫고, 1주일 만에 단연 그 자리를 물러 나섰던 것이다.
이 글은 소설가 정비석이 쓴 [김동인의 예술과 생애] 중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동인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순문학자, 그야말로 결벽증에 가까운 예술지상주의자로 추앙되어 있다. 문학 이외의 경력이나 이력 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직 소설의 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