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 동서남북, 모두 불이다.
강좌우편 언덕에 달아 놓은 불, 배에서 빛나는 수 천의 불, 지절거리며 오르내리는 수 없는 배, 배 틈으로 조금씩 보이는 물에서 반짝이는 푸른 불, 언덕과 배에서 지절거리는 사람의 떼, 그 지절거림을 누르고 때로는 크게 울리는 기생의 노래, 그것을 모두 싼 어두운 대기에 반사하는 빛, 강렬한 사람의 냄새…… 유명한 평양 4월 8일의 불놀이의 경치를 순서 없이 벌여 놓으면 대개 이것이다.
도깨비는 어둠에 모여들고 사람은 불에 모여든다.
그들은 거기서 삶을 찾고 즐거움을 찾고 위안을 찾으려 한다.
사정 없이 조그만 틈까지라도 비추는 해에게 괴로움을 받던 〈 사람〉들은, 비추면서도 덮어 주고 빛나면서도 여유가 있고 나타내면서도 감싸 주는 불 아래로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답게 빛나는 불 밑에서 그들은 웃으며 즐기며 춤추며 날뛰면서, 하루 종일 받은 괴로움을 잊으며, 또는 오늘날에 이를 어지러움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이불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똑똑히 나타낸 자가 4월 8일의 불놀이이다.
1900년에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에 처음에는 화가가 될 작정으로 천단(川端)미술학원에 재학중이다가 중도에 뜻을 달리하여 문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무정}이 있었을 뿐으로 순문학 작품은 아직 형태조차 없던 시대건만, 어려서부터 외국문학을 섭렵하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에 독립만세의 봉화가 터지기보다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순문학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신문학운동의 봉화인 그 잡지는 순전히 선생의 사재로서 발간되었던 것이다.
{창조} 발간 이후 김동인 선생은 30여 년간 오로지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셨다. 문학자가 문학도에 정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되, 문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딱한 사정에서 거개의 우리나라 문인들이 문학 이외에 반드시 생계를 위한 별도의 직업을 가졌건만, 선생만은 조석이 마루한 극도의 빈한(貧寒) 속에서도 오직 문학만을 일삼으셨던 것이다. 오직 한 번 조선일보사 문예부장에 일시 취임했던 일이 있으나, 선생은 그 길이 아님을 이내 깨닫고, 1주일 만에 단연 그 자리를 물러 나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