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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는 이번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동안(그로 하여금 그 그림에 온힘을 쓰게 하려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러 나, 이 날은 너무 갑갑하고도 궁금도 하여 참다 못하여 찾아갔다. 인젠 다 그렸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화실을 들어서서 보매, 그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캔버스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오지는 나가는지도 모르고……. “○.” 나는 가만히 그를 찾았다. 그는 펄떡 놀라면서 천천히 머리를 들어서 나를 보고 교자를 손가락질 한다. “다 그렸나?” “네.” “어디, 몸이 편찮은가?” “머…….” 그는 대답하기도 시끄러운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하얗게 된 그의..
○는 이번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동안(그로 하여금 그 그림에 온힘을 쓰게 하려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러 나, 이 날은 너무 갑갑하고도 궁금도 하여 참다 못하여 찾아갔다.

인젠 다 그렸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화실을 들어서서 보매, 그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캔버스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오지는 나가는지도 모르고…….

“○.”

나는 가만히 그를 찾았다.

그는 펄떡 놀라면서 천천히 머리를 들어서 나를 보고 교자를 손가락질 한다.

“다 그렸나?”

“네.”

“어디, 몸이 편찮은가?”

“머…….”

그는 대답하기도 시끄러운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하얗게 된 그의 낯에서는 고민과 괴로움과 미움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머리를 짚어 보았다. 즉 그는 시끄러운 듯이 내 손을 밀어 버리고, 머리를 저편으로 돌리고 말았다.

“○! 왜그래!”

나는 다시 그를 찾았다.

그는 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곧 일어서서 쾌활히,

“에, 머리 아파!”

하면서, 담배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거짓 쾌활임을 알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확실히 어떤 괴로움이 있었다.

“이 그림 좀 봐 주십쇼.”

그는 나를 이끌고 그림 앞에 가 섰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보는 순간 마치 무엇으로 얻어맞은 것같이 멈칫 섰다.
1900년에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신 선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에 처음에는 화가가 될 작정으로 천단(川端)미술학원에 재학중이다가 중도에 뜻을 달리하여 문학의 길을 택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무정}이 있었을 뿐으로 순문학 작품은 아직 형태조차 없던 시대건만, 어려서부터 외국문학을 섭렵하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9년에 독립만세의 봉화가 터지기보다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순문학잡지 {창조}를 발간하였다.……신문학운동의 봉화인 그 잡지는 순전히 선생의 사재로서 발간되었던 것이다.

{창조} 발간 이후 김동인 선생은 30여 년간 오로지 문학의 길로만 정진하셨다. 문학자가 문학도에 정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되, 문학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딱한 사정에서 거개의 우리나라 문인들이 문학 이외에 반드시 생계를 위한 별도의 직업을 가졌건만, 선생만은 조석이 마루한 극도의 빈한(貧寒) 속에서도 오직 문학만을 일삼으셨던 것이다. 오직 한 번 조선일보사 문예부장에 일시 취임했던 일이 있으나, 선생은 그 길이 아님을 이내 깨닫고, 1주일 만에 단연 그 자리를 물러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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