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구 씨에게는 약혼한 처녀가 있으며…….”
“최성구 씨는 혼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의 고향인 T군으로 내려갔으니 …….”
이러한 편지를 처음으로 받았을 때는 정희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성구와 근 일 년을 교제(라 할까?)를 하는 동안에 정희는 성구에게서 그댓 이야기는 듣지는 못한 - 뿐만 아니라 정희에게는 어떠한 여자와 혼약을 한 사내가 근 일 년이나 다른 여자(정희 자기)와 교제를 하면서 한번도 혼약한 여자를 찾아가 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그 편지에 있는 말 이 사실이라 하면, 성구는 그 근 일 년 동안에(설혹 찾아는 못 갔다 할지라도)한마디의 한숨이라도 지었을 것이었다. 근심과 비련의 눈물이라도 지었을 것이었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 자기와 성구의 사이의 사랑이며 자기의 쉬는 조그만 한숨이며 엷은 웃음에까지 차디찬 이 지적 해부안(解剖眼)을 던지느니만치 - 이기적으로 생긴 정희 자기의 눈에(만약 성구에게 그런 행동이 있기만 하였더라면)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변변치 않게…….”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렸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내고, 1944년 친일소설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로 중단하고 6 ·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