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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업을 이으려

그것은 내가 ○○사(社)에서 일을 볼 때의 일이니까, 벌써 반 10년이 지난 옛날 일이외다. 그때 ○○사에 탐방 기자로 있던 나는, 봄도 다 가고 여름이라 하여도 좋을 어떤 더운 날 사의 임무를 띠고 어떤 여자를 한 사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로 동북쪽으로 서너 정거장 더 가서 내려서도 한 30리나 걸어가야 할 이름도 없는 땅으로서 본래는 사에서도 그런 곳은 가볼 필요도 없다고 거절한 것이지만, 그 전달에 내가 어떤 귀족 집안의 분규를(아직 신문사에서도 모르는 것을) 얻어내어 잡지에 게재하여 그 때문에 잡지의 흥정이 괜찮았으므로 내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하였습니다. 사건은 그때 신문에도 다치키리로 한 비극으로 몇 회를 연하여 발표된 주지의 사실인지라, 특별히 방문까지 안 하더라도 넉넉한..
그것은 내가 ○○사(社)에서 일을 볼 때의 일이니까, 벌써 반 10년이 지난 옛날 일이외다.

그때 ○○사에 탐방 기자로 있던 나는, 봄도 다 가고 여름이라 하여도 좋을 어떤 더운 날 사의 임무를 띠고 어떤 여자를 한 사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로 동북쪽으로 서너 정거장 더 가서 내려서도 한 30리나 걸어가야 할 이름도 없는 땅으로서 본래는 사에서도 그런 곳은 가볼 필요도 없다고 거절한 것이지만, 그 전달에 내가 어떤 귀족 집안의 분규를(아직 신문사에서도 모르는 것을) 얻어내어 잡지에 게재하여 그 때문에 잡지의 흥정이 괜찮았으므로 내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하였습니다.

사건은 그때 신문에도 다치키리로 한 비극으로 몇 회를 연하여 발표된 주지의 사실인지라, 특별히 방문까지 안 하더라도 넉넉한 일이지만 그때는 마침 다만 하루라도 교외의 시원한 공기를 마셔보고 싶던 때에 겸하여 함흥까지 가는 친구를 전송도 할 겸 거기까지 가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사실을 자백하자면 신문을 참조해가면서 벌써 방문도 하기 전에 기사까지 모두 써 두었던 것으로서 말하자면 이 ‘방문’이란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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