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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김동인 미완의 단편소설이다. 오학동(五鶴洞)은 이씨촌(李氏村)이었다. 한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집안이 무룡(舞龍)재를 넘어 이곳으로 와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오학동의 시작이었다. 조상의 뼈를 좋은 곳에 묻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백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온 한 집안은, 삼백 년 뒤— 그때의 조상부터 십 오륙 대를 내려온 지금에는, 거기는 커다란 동네를 이루어 호구 일백 사십여 호 사람의 수효 육칠백 명, 항렬로 캐어서 어린아이의 고조부로 비롯하여 늙은 고손까지 촌수로는 이십 육칠 촌까지의 순전한 이씨와 그들의 아내들로서 커다란 마을을 이루었다. 오학동의 동쪽에는 무룡재라는 매우 가파로운 뫼껸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말령[마령(馬嶺)]이라는 역시 가파로운 뫼껸이 있었다. 그 무..
김동인 미완의 단편소설이다.

오학동(五鶴洞)은 이씨촌(李氏村)이었다.

한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집안이 무룡(舞龍)재를 넘어 이곳으로 와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오학동의 시작이었다. 조상의 뼈를 좋은 곳에 묻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백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온 한 집안은, 삼백 년 뒤— 그때의 조상부터 십 오륙 대를 내려온 지금에는, 거기는 커다란 동네를 이루어 호구 일백 사십여 호 사람의 수효 육칠백 명, 항렬로 캐어서 어린아이의 고조부로 비롯하여 늙은 고손까지 촌수로는 이십 육칠 촌까지의 순전한 이씨와 그들의 아내들로서 커다란 마을을 이루었다.

오학동의 동쪽에는 무룡재라는 매우 가파로운 뫼껸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말령[마령(馬嶺)]이라는 역시 가파로운 뫼껸이 있었다. 그 무룡재와 말령은 오학동에서 오 리쯤 북쪽에 가서 겨우 작은 개울이 하나 흐를이만치 벌어지고 오 리쯤 남으로 가서는 서로 합하여서, 만약 하늘에서 그곳을 내려다볼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묏마루에 있는 한 구렁텅이와 같았다. 그러 므로 세상에서는 오학동과 그 근방 일대— 무룡재와 말령에 둘러싸인—를 가리켜 ○○골이라 하였다. 여자의 생식기를 따서 붙인 그 골짜기의 이름은 모양으로 보아서 그럴듯하였다.

○○골에는 마을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물론 오학 동이요, 또 하나는 정방(正坊)이라는 동네였다. 오학 동은 ○○골의 중앙에 있었고, 정방은 무룡재와 말령 이 남쪽에 합쳐진 그 산밑에 있었다. 두 마을의 거리는 한 오 리쯤 되었다.

김동인 ( 金東仁 1900 ~1951)

본관 전주. 호 금동, 금동인, 춘사, 창씨명, 곤토 후미히토.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렸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내고, 1944년 친일소설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로 중단하고 6 ·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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