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단편소설이다.
그것은 봄답지 않은 암담한 봄날이었다. 들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하고 온갖 새와 나비가 날아드는 — 말하자면 절기로는 봄임에 틀림이 없지만 백성의 기분에는 봄답지 않은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16년 춘삼월, 겨우내 혹독한 추위에 얼었던 땅이 따스한 봄기운에 녹아남에 따라서 추위를 피하노라고 방에 꾹 박혀있던 백제의 백성들도 길거리로 나다니기는 하지만 얼굴에는 음산한 기분과 근심이 서리어 있었다.
웬만한 근심, 웬만한 수심은 모두 녹여버리는 꽃의 시절인 봄이거늘 백제 창생의 근심은 이 시절의 힘으 로도 녹여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근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국왕의 방탕과 국력의 쇠약에 겸하여, 이 백제의 쇠약을 호시탐탐 기 다리는 신라국의 태도가 그들의 근심의 근원이었다.
지금 왕—선왕(先王)인 무왕(武王)의 아드님으로서 지극히도 담략과 패기가 있는 분이어서 그 등극초에는 백제의 창생이 그야말로 이 명군의 아래 삼국통일 의 대업이 이루어지리라고까지 믿었던 바이었다.
이 현철하고 용감하고 자비한 왕은 등극 초에는 극력으로 국력양성과 국토확장에 힘을 써서 인방(隣邦) 신라 같은 나라는 백제에 병합이 되지 않나 생각하게 할 만하였다 신라의 변방은 모두 이왕의 정복한 바가 되고 미후성(城), 대야성(大耶城) 등 신라의 거성이 모두 이 왕께 항복하여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 업적이 10년이 넘으면서부터는 왕은 이제는 안심을 한 탓인지 차차 안일에 빠지게 되었다. 3 천 후궁을 데리고 매일 큰 연회를 열고, 혹은 사냥을 다니고, 여기 침닉한 왕은 이제는 국사를 돌보려 하지도 않았다.
국정이 차차 흐리게 되었는지라 국력도 자연히 쇠약하게 되었다.
왕이 현철하기 때문에 숱한 욕을 보고도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던 신라는 백제의 왕도가 차차 흐려가는 기회를 타서 복수전의 준비를 차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신라에도 태종무열왕(太宗 武烈王)이 등극하고 명장 김유신(金庾信) 등이 대두하면서부터는 이제는 깔보지 못할 형세인 데다가 더욱이 복수의 일념까지 강하게 되었으니 백제의 마음 있는 자는 물론 근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왕은 나날이 연락(宴樂)만 즐기고 왕도는 돌볼 생각도 안 한다.
이렇기 때문에 백제의 민심은 전전긍긍하였다. 춘삼월—좋은 시절이지만 백제 백성들의 얼굴에서는 겨울의 음산한 기운이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김동인 ( 金東仁 1900 ~1951)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렸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내고, 1944년 친일소설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로 중단하고 6 ·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