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다. 우리는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긍정과 부정 양측면을 다 가지고 있는 삼국사기를 연구 할수밖에 없다. 우리 고대 사서의 소멸로 인하여 삼국시대의 정사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서로는 삼국사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가슴 찌뿌등하고 답답함을 느낀다.자신의 나라를 비하하고 중국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고구려 백제는 폄하하고 신라는 높이면서 편중되어 있다.본기 곳곳에 기술한 저자의 견해는 김부식의 사상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과연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스럽다.아무리 중국의 눈치를 본다고는 하나 너무 심하다.혹자는 그렇게 썼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오늘날 까지 살아남을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현실적으로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하게도 되지만 이나라 역사 왜곡의 단초를 삼국사기가 제공했다는걸 생각하면 차라리 없었던 편이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면 다른 사서들이 존재 했을 것이고 역사 왜곡 또한 그리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삼국사기를 이유로 다른 사서들이 모두 멸실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우리민족의 얼과 혼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반도 구석으로 몰아넣어 몸과 마음을 작은 나라에 약소국민으로 전락시켜 버려 사대주의가 당연시되는 관념의 틀을 고정시켜 버렸다.발해 멸망이후 1,000년동안 북벌을 주장한 사람은 묘청과 효종 두사람 뿐이다(TV 드라마 왕건에 나오던 궁예도 있었다).정신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고토회복의 기치는 고사하고 감히 중국을 넘본단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비교해 보자 중국은 춘추기법으로 저희는 높이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상대방은 낮추고 간략하게 적는다.일본은 어떤가.이건 순 날조다.고대부터 현재까지 저희가 최고라고 우기고 거기에 필요한게 있으면 무엇이던지 조작, 날조, 훼손을 한다.그리고 철판 깔고 우긴다.아주 천재적이다.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두나라와는 반대로 내것도 우리것이 아니라고 하고 상대는 높이고 우리는 낮춘다.예의바른 민족이라 그런가 겸손이 미덕인 나라라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 금할수 없다.
고려시대의 문신. 호는 뇌천(雷川),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로 삼국사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고 한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에서도 손꼽히는 문벌 집안. 당대의 권신 이자겸하고도 맞짱을 뜰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였다[1].
사실 명문이긴 했지만 개경의 중앙귀족에 비하면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고, 부친이나 조부나 높은 직위에 있지는 않았다. 가문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건 김부식의 5형제 때부터인데, 장남은 윤관의 여진전쟁 당시 전선에서 활약했고, 나머지도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5형제의 母는 고려에서 큰 포상을 받았다.
이후 이자겸 및 문벌귀족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예종은 신진 측근세력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 때 측근세력으로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 한안인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자겸에게 제거된다. 이후 인종도 측근 신진세력을 양성하는데 이 때 적극적이었던 인물인 김찬과 안보린 등은 모조리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제거된다. 김부식은 이 시기 한번 꿈틀한 적을 제외하면 조용히 이자겸 치하에서 승진을 거듭하는 등 이자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이 인종과 척준경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참가[2]하여 이후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 급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척준경을 제거하면서 정권의 중심을 장악한 정지상 등의 서경파[3]에 대항하여 기존의 문벌귀족을 대표하는 개경파 귀족으로서 김부식 일족이 급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운동[4]이 결국 개경파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5]로 돌아가자 서경파중에서 강경파였던 묘청이 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이 때 김부식은 개경파의 대표로서 묘청의 난을 제압하는 총대장에 임명 되는데, 일단 개경에 있던 온건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목부터 날리고 시작한다[6]. 결국 김부식은 1년 2개월에 걸친 싸움끝에 이 반란을 제압했다.
이때 김부식은 서경 하나로 반란군의 거점을 제한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부식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좌군은 황주와 자비령에서 서경을 견제하고, 우군은 동계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며, 중군이 뒤에서 조율하는 방식으로 서경군의 세력 확대를 차단했다. 단지 이 기동만으로 개천, 성주에서 서경군 2,000명이 친왕파의 역봉기로 괴멸되고 서경군의 세력 확대 시도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는 김부식의 동생 김부의의 제안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김부식이 이러한 전략적 의도와 결과를 예견할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직후 묘청의 목이 배달되었는데 여기까지는 관군의 무혈 승리였다. 다만 이후 난이 길어진 것은 정부 사절인 김부가 서경을 거칠게 다룬 탓이 컸다.
서경 공방전에서도 김부식은 서경군의 야습을 예측하고 대동강 남쪽의 후군에 예비대 1천명을 급파했고, 덕분에 관군은 서경군의 야습을 차단하여 서경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간 것도 김부식의 전략이었다. 김부식이 서경을 포위만 한 채 전쟁이 길어지자 그를 탄핵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김부식은 "전쟁이란 본래 빠른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것도 있다"면서 공격론에 반대한다. 김부식은 서경의 기능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고, 장기전으로 끌고가면서 최소한의 피해로 서경을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김부식이 치졸하게 윤언이를 견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와 별개로 총사령관에게 요구되는 전략적 식견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