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단편소설이다.
형과 서로 떠난지가 벌써 팔년이로구려. 그 금요일 밤에 Y목사 집에서 내가 그처럼 수치스러운 심문을 받을 때에 나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믿어 주던 형은 동정이 그득한 눈으로 내게서 「아니요!」하는 힘있는 대답을 기다리신 줄을 내가 잘 알았소. 아마 그 자리에 모여 앉았던 사람들 중에는 형 한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 내가 죄가 있기를 원하였겠지요. 그 김씨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게 순후한 Y목사까지도 꼭 내게 있기를 바랐고 「죽일 놈!」하고 속으로 나를 미워하였을 것이외다.
그러나 내가 마침내,
『여러분 나는 죄인이외다. 모든 허물이 다 내게 있소이다!』
하고 내 죄를 자백할 때에 지금까지 내가 애매한 줄만 믿고 있던 형이,
『에끼 ─ 네가 그런 추한 놈인 줄은 몰랐다.』
하고 발길로 나를 걷어찬형 의 심사를 나는 잘 알고 또 눈물이 흐르도록 고맙게 생각하오. 만일 나를 그처럼 깊이 사랑해 주지 아니하였던들 형이 그처럼 괴로와하고 성을 내었을 리가 없을 것이요.
그때에 목사는 가장 동정이 많은 낯으로 내 손목을 잡으며,
『박군 ─ 회개하시오, 회개하시오.』
하고 나를 위하여 기도까지 하여 주었지마는 그보다도 형의 발길로 얻어채인 것이 더욱 고마왔소이다.
나는 그 길로 그 누명을 뒤집어쓰고 동경을 떠났소이다. 떠나는 길에 한 번만 형을 보고 갈 양으로 몇 번이나 형의 집 앞에서 오락가락하였을까. 그러다가도 문소리가 나면 혹 형이 나오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몇 번이나 몸을 숨겼을까. 늦은 가을 동경에 유명한 궂은 비가 부슬거리는 그 침침한 골목에서 살아서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나의 행색이 얼마나 가련하였을까.
더우기 사랑하는 형네 남매와 이주년이나 친 동기와 다름없이 지내다가 마침내 내가 형과 맟 형의 매씨에게 대하여 감히 못할 더러운 죄를 지었다는 누명을 쓰고 제가 있던 집에 다시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어슬렁어슬렁 떠나 가는 내 심사가 얼마나 하였을까 ── 형아, 아마 형은 상상하리라고 믿는다. 또 만일 그때에 내가 정말 죄인이 아니요, 진실로 애매한 사람이었다 하면 더욱 나의 심사가 얼마나 하였을까. 형아, 이 말에 놀라지 말라.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춘원(春園).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수학 중 동경 2·8 독립 선언을 주도. <조선 청년 독립단 선언서> 기초. 상해 <독립신문> 편집 주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관계함.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됨. <조선 문인 협회> 회장 역임. 1909년 <백금학보(白金學報)에 <애(愛)>를 발표한 이후 1917년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신문학 초창기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근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초기 한국 문단의 성립을 주도했다는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말기에 변절하여 친일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중적인 성향을 띄면서도 계몽주의적·이상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데 지나친 계몽 사상으로 인해 설교적인 요소가 많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린 희생>, <무정>,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개척자> <무명>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유정>,<사랑> 등 다수가 있다.